조선어학회와 1933년 맞춤법 통일안, 한글 맞춤법 변화사의 전환점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은 왜 중요한가? 조선어학회의 역할과 한글 맞춤법 변화사의 의미를 통해 민족 정체성과 언어 보존의 역사를 살펴봅니다.”
[목차]
- 한글 맞춤법 변화사의 큰 흐름과 1933년 이전의 혼란
- 조선어학회의 등장과 한글 맞춤법 정리 운동
-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에서 조선어학회의 역할
- 한글 맞춤법 변화사 속 조선어학회의 영향과 그 역사적 의의
1. 한글 맞춤법 변화사의 큰 흐름과 1933년 이전의 혼란
한글은 1443년 세종대왕이 창제하고 1446년 반포된 이후 우리 민족의 생활 속에서 꾸준히 사용되었지만, 그 활용과 표기 방식은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해 왔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제시했던 원리는 음운과 문자 사이의 과학적 대응을 보여주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적 요구와 현실적 사용이 변해가며 원래의 체계가 유지되지 못했다.
조선 후기에는 공문서와 학문 세계가 한문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한글은 주로 여성과 평민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문자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한글은 정규 교육의 대상이 되지 못했고, 따라서 언중들 사이에서 표기법의 통일이나 규범화가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이 시기의 한글 맞춤법은 지역, 계층, 저자에 따라 제각각이었고, 단어와 문장마다 서로 다른 표기법이 혼재했다.
19세기 말 개화기와 함께 한글은 공적 영역으로 점차 진입했다. 신문, 교과서, 잡지와 같은 인쇄 매체가 등장하면서 한글 사용이 본격화되었는데, 문제는 이 시점에서 표기 혼란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는 점이다. 각 매체는 저마다 다른 맞춤법을 사용했다. 예를 들어, ‘나라’라는 단어는 어떤 매체에서는 지금처럼 ‘나라’로, 다른 곳에서는 ‘나랏’으로 쓰기도 했다. 또 같은 발음을 두고 표기 방식이 달라 독자가 글을 읽을 때마다 혼란을 겪었다. 교육 현장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교사들조차 각자 다른 기준을 따라 가르쳤고, 학생들은 여러 가지 맞춤법을 동시에 배우면서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한글 맞춤법 변화사는 단순히 언어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 학문, 출판 전반에 걸친 사회적 난제였다.
이 시기 국어학자들과 지식인들은 이러한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맞춤법을 정리하고 통일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이미 서구에서는 근대적 언어학을 토대로 국가 단위의 표준 맞춤법과 사전을 정리하고 있었고, 조선에서도 근대 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언어 규범의 확립이 절실했다. 그러나 당시의 현실은 일제 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언어 정리는 단순한 학문적 과제에 그치지 않고 민족 정체성과 직결된 문제였다.
언어를 지킨다는 것은 곧 민족을 지킨다는 의미를 가졌고, 맞춤법을 통일하는 작업은 단순한 규범의 확립이 아니라 민족적 저항의 형태로 이해되었다. 바로 이런 배경이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며, 이후 한글 맞춤법 변화사의 거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2. 조선어학회의 등장과 한글 맞춤법 정리 운동
조선어학회는 이러한 혼란을 정리하고 한글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등장한 대표적인 학술 단체였다. 조선어학회는 주시경을 비롯한 선구적 국어학자들의 연구 전통을 이어받아 1921년 창립된 조선어연구회에서 출발했다. 이 단체는 후일 명칭을 바꾸어 조선어학회가 되었는데,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꾸준히 국어 연구와 보급 운동을 이끌었다. 그들의 활동은 단순히 학문적 연구에 머물지 않고, 한글을 민족의 언어로서 보존하고 발전시키려는 사회운동의 성격을 띠었다.
조선어학회가 활동하던 당시, 한글 맞춤법은 학자마다, 지역마다 다르게 사용되었다. 주시경, 지석영, 최현배 등 여러 학자가 나름의 원칙을 제시했지만, 그 기준은 통일되지 못했고 때로는 서로 충돌하기도 했다. 예컨대 어떤 학자는 발음 중심으로 표기를 정리하려 했고, 또 다른 학자는 형태 중심으로 접근했다. 이로 인해 동일한 단어를 두고도 표기가 달라졌으며, 학자들 간에도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어학회는 이러한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국어 정리 운동’을 펼쳤다. 그들은 학자들만의 논의에 머물지 않고, 교육자와 언론인, 일반 독자들의 현실적 요구를 반영하여 사회 전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규범을 마련하려 했다.
특히 조선어학회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마련하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서 표준어 규정 정리, 사전 편찬, 철자법 연구를 병행했다. 이들은 음운론적 원칙과 형태론적 원칙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에 대한 치열한 논의를 벌였고, 지나치게 현실 발음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대중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체계를 추구했다. 이는 단순히 학문적 차원에서 맞춤법을 정리하는 작업이 아니라, 민족 전체가 공유할 수 있는 언어 규범을 만드는 과정이었다. 따라서 한글 맞춤법 변화사에서 조선어학회의 등장은 근대적 맞춤법 정리 운동이 본격화되는 중요한 기점으로 평가된다.
이들의 활동은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았다. 일본은 조선어 사용을 억압하면서도, 동시에 조선어의 통일된 규범 마련을 방해했다. 그러나 조선어학회는 끊임없는 연구와 사회적 설득을 통해 한글 맞춤법 통일의 필요성을 확산시켰다. 이는 단순한 언어 규범의 정립이 아니라, 억압받는 현실 속에서도 민족이 스스로 언어를 지켜내려는 저항의 형태였으며, 이후 1933년 맞춤법 통일안 제정으로 이어졌다. 조선어학회의 이러한 노력은 한글 맞춤법 변화사에서 매우 결정적인 의미를 가지며, 이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표준 맞춤법은 훨씬 늦게 정착되었을지도 모른다.
3.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에서 조선어학회의 역할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은 한글 맞춤법 변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가운데 하나이며, 그 중심에는 조선어학회가 있었다. 조선어학회는 수년간의 연구와 토론을 통해 통일안을 마련했는데, 그 과정은 단순한 학술적 논의가 아니라 민족 전체의 언어 생활을 새롭게 규범화하는 작업이었다. 당시 학자들은 두 가지 큰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첫째는 발음을 그대로 표기에 반영할 것인가, 아니면 어근과 형태를 유지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둘째는 기존의 다양한 맞춤법 제안을 어떻게 하나로 조율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예를 들어, ‘먹었다’라는 단어를 발음을 기준으로 하면 ‘머걱따’와 같이 적을 수도 있었지만, 이는 실제 발음과는 일치하더라도 단어의 어근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반면 형태를 유지하면 ‘먹었다’가 되지만, 이는 발음과 일치하지 않기에 대중이 혼란을 겪을 수 있었다. 조선어학회는 이러한 양 극단을 모두 수용하기보다는, 음운론적 원칙과 형태론적 원칙을 절충하는 방식으로 나아갔다. 이는 학문적으로도 타당하면서 대중적으로도 수용 가능한 절충안이었고, 결국 1933년 통일안의 가장 큰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조선어학회는 통일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내부 학자들만의 의견에 의존하지 않았다. 교사, 언론인, 출판 관계자 등 사회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하여 실제 생활 속에서 활용 가능한 맞춤법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이처럼 조선어학회는 학문적 권위와 사회적 현실을 동시에 반영하려 했기 때문에, 그들의 통일안은 단순히 책상 위에서 나온 학문적 성과가 아니라 민족 전체가 함께 합의한 규범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1933년 10월 29일 발표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은 총 6장 145항으로 구성되었으며, 단순한 철자 규정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일제 강점기라는 억압적 환경 속에서 조선인들이 주체적으로 언어를 정리하고,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낸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이 통일안은 이후 해방 이후의 표준 맞춤법 제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맞춤법 역시 그 원칙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한글 맞춤법 변화사 속에서 1933년 통일안은 학문적·사회적·민족적 의의가 모두 결합된 사건이며, 그 중심에 조선어학회의 활동이 있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4. 한글 맞춤법 변화사 속 조선어학회의 영향과 그 역사적 의의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은 단순히 한 시기의 성과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이후 수십 년 동안 한국어 맞춤법의 근간을 형성했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제정한 표준 맞춤법은 기본적으로 1933년 통일안을 계승했다. 몇 차례의 개정이 있었지만, 그 뼈대는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당시 조선어학회의 결정이 얼마나 정교하고 앞서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한글 맞춤법 변화사에서 조선어학회의 영향은 장기적인 차원에서도 매우 크다.
또한 조선어학회는 맞춤법 통일안 제정 과정에서 언어학적 성과뿐만 아니라, 민족운동의 한 축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일제는 한국어 사용을 억압하고 일본어를 강제하려 했지만, 조선어학회는 이러한 압박 속에서도 끊임없이 연구를 이어갔다. 심지어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인해 회원들이 투옥되는 시련을 겪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을 지키려는 노력은 꺾이지 않았다. 이 사건은 조선어학회가 단순한 학문 단체가 아니라 민족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저항 조직이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1933년 통일안이 남긴 또 다른 의의는, 언어를 통한 민족 정체성의 강화였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 조선인들이 맞춤법을 스스로 정리하고 체계화했다는 것은, ‘우리는 우리 언어를 스스로 지킨다’는 강력한 선언이었다. 이 선언은 단순히 글자와 규범의 문제가 아니라, 민족 문화와 독립 정신을 이어가는 행위였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사용하는 맞춤법 뒤에는, 억압 속에서도 언어를 지켜낸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결국, 조선어학회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은 한글 맞춤법을 단순히 ‘쓰기 규칙’으로 확립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민족적 자부심과 정체성의 상징으로 끌어올린 데 있었다. 오늘날 한글은 디지털 시대에도 가장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문자 체계로 평가받으며, 세계적으로도 연구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러한 자부심의 바탕에는 1933년 통일안과 조선어학회의 활동이 존재한다. 따라서 한글 맞춤법 변화사 속에서 조선어학회가 끼친 영향은 언어학적·사회적·역사적 차원을 아우르는, 한국 근현대사의 대표적 성과라 할 수 있다.